한 때 영화 티켓을 모아 수첩에 붙여두는 게 취미였던 적이 있다.
본 순서대로 고이 모아놓은 티켓중에 가장 첫 영화표는2001년도에 개봉한 'A.I.' 영화 티켓이다.
어렴풋한 기억이긴 하지만 A.I. 영화에 큰 감명을 받고 그 때 부터 영화표를 모으기 시작한 듯.
SF영화는 내게 영화표 모으기를 시작하게 해 준 장르였다.
아닌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만, SF는 내가 완전 선호하는 장르이다.
외계인에게 침략당한 인간들이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프레임이 어느정도 그려진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은 침략자와 수호자/피의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독특한 프레임을 만들었다.
감독 닐 블롬캠프는 여느 SF영화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하고자 했다.
배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이다.
그리고 막연하게 시간적 배경도 미래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이 영화의 배경은 현재이다. (혹은 멀지않은 근 미래)
1982년, 외계인들을 가득 태운 대형 우주선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났고,
왜인지 이 거대한 우주선은 그냥 몇 달간 상공에 머물러만 있다.
모선에서 분리된 사령선이 어디론가 사라진 후 이동이 불가했던 것 같다고 인간들은 추측한다.
일단 인간들은 우주선 내로 들어가보기로 하는데, 우주선 안의 광경은 생각보다 처참하다.
첫 등장부터 여느 영화에서 보았던 막강한 괴능력을 가진 외계인과는 큰 갭이 느껴진다.
우주선 내에는 영양실조 등 건강 상태가 나쁜 외계인들이 수없이 널부러져 있었다.
불빛에 놀라 기다시피 절뚝거리며 도망가는 외계인..
윗 영상이 공개되자, 그들을 도와줘야한다는 국제사회 여론이 높아지게 되고
남아공 정부는 우주선 바로 밑에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1백만의 외계인을 옮기고 수용해주게 된다.
하지만 (인간 입장에선 너무도 당연한거겠지만) 그들은 외계인이었기에 그들을 수용한 지역 주변은 철조망이 쳐지고, 군대가 배치된다.
이 후 이 지역은 무법지대가 되었고,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잔인하고 더러운 비밀이 들끓는 구역이 되는데
이곳의 이름이 영화 제목인 디스트릭트 9 (제 9구역) 이다.
십 수년이 지난 현재, 처음 그들을 수용해줄 때의 인도주의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그들과 공생해야 하는 사실에 극도의 불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들이 많아진다.
인간은 MNU(다국적연합)를 만드는 등 어느정도 외계인과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듯 하였으나
진정 공생을 위한 것인지, 일방적인 통제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정책들이 난무할 뿐이다.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디스트릭트 9 지역에 거주하는 외계인들을
주요 도시에서부터 더 먼 외곽지역으로 옮기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대외적으론 외계인의 편리를 도모했다고 포장하나, 사실상 불법이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위한 행보임을 모두 알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 프로젝트의 관리자인 비커스이다.
프로젝트 인터뷰 내내 본인의 업무를 이야기하며 싱글벙글한 모습이다.
그는 외계인 관리과 사람이지만, 외계인의 현실과 고난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 속 외계인과 가깝고도 먼 인간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퇴거 동의서를 받기 위해 디스트릭트 구역에 서류를 가지고 방문하는 비커스.
오랫동안 인간들과 대치되었던 외계인들은 호의적일 리가 없다. (그나저나 손이 닿았으니 동의한거야' 라니...ㅋ)
그들이 좋아하는 고양이 캔 사료로 회유해 외계인들이 퇴거에 동의케끔 하거나, 그들의 태아인 알을 장난삼아 제거하는 등
(심지어 알을 낳는 행위가 '불법'이고, 외계인의 알을 제거하는 전담팀까지 있다.)
인간들이 마음만 먹으면 외계인들의 생활과 생명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상황이 여실히 보여진다.
퇴거를 명목으로 한 일방적인 집 수색이 이어지고, 외계인들이 숨겨놓은 무기가 속속 발견된다.
그들의 무기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 MNU는 퇴거를 명목으로 내세워 그 무기들을 압수하여 모으려고 한 것이다.
그 무기는 오로지 외계인들의 DNA에만 반응하여 작동하지만 MNU는 자신들이 쓸 수 없는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버리지않는다.
(외계인들은 그렇게 강력한 무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나...
본인들을 포용해 준 지구인에 대한 '예의'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외계인보다 더 휴머니즘이 결여된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이란 생각이 든다.)
한 편 비커스는 실험 도구들이 가득한 외계인의 집을 수색하다 이상한 물건을 발견하게 되고,
만지작 거리던 중 물건에 담겨있던 액체가 얼굴에 튀어버린다.
저 액체는 외계인 크리스토퍼 존슨이 20년간 모아온 외계 특수 유동체인데,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 리가 없는 비커스는 참고품으로 수집한다며 쏠랑 가져가버린다.
얼굴에 유동체가 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커스는 어지러움을 느낀다.
심지어 검은 피가 코에서 흐르고 맥없이 손톱이 빠져버리는 등, 몸상태가 심상치 않자 병원을 찾는데..
외계인과 대치중에 살짝 다쳐서 붕대로 응급조치를 해놨던 손이... 외계인의 것이 되어있었다.
병원에는 대피령이 발령되고 즉시 가족과 격리되는 비커스.
병원에 함께 왔던 부인을 계속해서 찾지만 그의 요구는 묵살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비커스가 강제적으로 옮겨진 곳은 MNU의 비밀 실험실.
외계인의 내장을 뒤적거리는 실험실 직원, 상하체가 분리된 외계인의 시체, 정육점의 소고기마냥 거꾸로 매달린 외계인...
본인이 몸담았던 기관이 지하에서 무슨짓을 해왔는지를 목격한 그는 아연실색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본인도 그 외계인(이었던 것)들과 다를바 없어질거란 예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반나절 사이 인간에서 외계인이 된 비커스. 아니라고 부정해보고 억울하다 피력해보지만 아무도 그의 이야길 들어주지 않는다.
오늘 오전 본인이 외계인에게 그리했던 것 처럼...
돈을 쫓는 자들에게 비커스는 굉장한 가치를 지닌 실험대상이 되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외계인의 무기를 쓸 수 없었지만, 변형된 비커스에게는 외계 무기가 반응 했기 때문.
인간이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비커스에게서 본 것이다.
수 없이 많은 무기들이 모두 비커스의 DNA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목표물인 돼지를 사격하게 하고,
심지어 살아있는 외계인을 죽이는 실험까지 강행된다.
차라리 지금까지와 같이 돼지 시체에 무기를 쓰게 해달라고 호소하지만 그 또한 가벼이 묵살된다.
타겟으로 쓰는게 돼지 고기나 외계인이나 뭐가 다를거냐는 입장.
산산조각 난 외계인의 살점이 떨어질 때 모니터링룸은 돈계산으로 바쁘다.
심지어 가운데 서있는 MNU의 간부는 비커스의 장인어른.
돈 앞에서 한 없이 탐욕적인 인간을 역겨운 모습을 보여준다.
믿을 사람도, 기관도, 정책도 없었던 비커스는 실험실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뉴스에서는 외계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커스가 병원을 탈출했다는 속보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외계인과의 섹스를 통해 바이러스가 감염됐다는 둥, 병원 치료를 받았으면 나았을것이나 그가 거부했다는 둥
실상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이야기들만이 사실처럼 퍼져나간다.
결국 비커스는 인간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디스트릭트 9 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되는데,
비커스를 외계인으로 변하게 만든 유동체 제조자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자기의 팔과 같다며 비커스의 팔에 대보는 깨알같은 크리스토퍼의 순수한 아들ㅋㅋ)
우주선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특수 유동체를 비커스가 가져갔다는 것을 알게된 크리스토퍼.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모선으로 돌아가게 되면 본인의 팔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비커스.
하지만 일전 비커스가 수집해갔던 유동체는 MNU 실험실에서 압수했던 상태.
다른 선택권 없이 둘은 MNU 본부에 침입하기로 한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힘들게 유동체를 찾아 손에 넣었지만, 실험실에 남은 끔찍한 동족의 시체에 충격받은 크리스토퍼....
긴박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크리스토퍼에게
비커스는
라고 외친다.
외계인의 알을 태우며 팝콘 소리가 난다며 즐거워했던 그가, 외계인을 독려하기 위해 네 아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인간과 외계인은 어느 한 쪽이 열등한 것이 아닌 동등한 존재들임을 비커스가 무의식중에 인정한 장면이다.
가까스로 유동체를 가지고 디스트릭트로 돌아온 비커스와 크리스토퍼.
비커스는 이제 치료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고통받는 동료들을 구하는게 우선이라며 비커스에게 3년만 기다리라 말한다.
속았다는 생각에 광분한 비커스는 크리스토퍼를 넘어뜨리고 본인이 모선으로 가겠다고 나서는데...
비커스에게도 맞고, 그 와중에 용병에게도 잡힌 크리스토퍼. (ㅠㅠ)
모선을 띄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크리스토퍼가 이대로 사람의 손에 죽는건가..하는 순간,
사방이 무너지고
크리스토퍼의 거주지 지하에 숨겨져있던 사령선이 떠오른다.
마음 급했던 비커스가 모선으로 가기 위해 크리스토퍼를 버리고 무작정 사령선을 조종한것이다.
영화 스토리가 워낙 예측할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되기도 하고
비커스가 너무나 인간답게도(..) 자꾸 갈팡질팡 하는 바람에 어느지점에서 끊어야 할지 많이 애매했지만
요정도에서 끊는게 맞는 것 같다ㅋ
끝까지 갈팡질팡 본인의 안위만 생각하던 비커스는 다른 영화의 우직하고 정의로운 주인공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보는 내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 뜨끔뜨끔함을 선사해준다.
'보통'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해내어서, 마치 우리동네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일 것 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오히려 더 비커스의 마지막 결정에 응원을 보내게 되는 걸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 장면일 부분.
비커스의 큰 결심과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비커스를 대해준 크리스토퍼.
SF 장르에서 그것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아바타도 인간들이 가해자였긴 하지만 결국 '정의'와 '박애'를 실현하는 주체의 일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의롭고 박애주의적인 인간은 출현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제대로 된 인간이 한 명도 안나오는 영화는 처음이다.
우주선을 움직이는데 성공하는 장면을 보면서는 아, 이건 SF영화였지 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도 만든다.
현실 비판과 오락성의 두 마리 토끼를 정확하게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감독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그려낸 좋은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당신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함을 느껴야한다.
'가해자'거나 '방관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누군가에겐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였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보고 불편함을 느꼈길 바란다.
그 불편함이 우리 마음속의 최소한의 휴머니즘이니까.
그리고, 제발... 크리스토퍼야..우리 비커스 좀 구하러 돌아와주세요...
3년뒤에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지금 몇 년째니...